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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펙터의 수장 '블로펠드'를 처단하고 은퇴 생활을 즐기던 '제임스 본드' 앞에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MI6 산하의 연구소 직원이 의문의 조직에 납치당하자 '본드'는 CIA 요원 '펠릭스 라이터'와 함께 이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신기술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비밀 조직은 베일에 가려진 채 세계 안보와 '제임스 본드'의 목숨을 위협한다. 과거와 달리 지켜야 할 것이 생긴 '본드'는 마지막 임무에 발을 디딘다.

 

  [카지노 로얄] 이후 15년간 현 시대의 007 역할을 해내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도 어느덧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의 시리즈를 결산하는 마지막 편인 만큼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 [스펙터] 등 전작들과의 연관성이 집중되지만 의외의 중요성을 띤 영화는 1969년작 [여왕 폐하 대작전]이다. 조지 레이전비가 주연한 해당작은 007 사상 최초로 배우 교체가 이루어진 작품으로 기존과는 사뭇 다른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숀 코너리의 지난 영광을 결산하고 '제임스 본드'치고는 파격적인 설정을 내세워 앞으로 뻗어나가려는 성향이 강했지만 기존 팬들의 반발과 배우와의 불협화음 탓에 조지 레이전비 천하는 단 한 편으로 끝이 나버렸다.

 

  [여왕 폐하 대작전]은 그 갸륵한 모험 정신 덕에 세월이 흐를수록 재평가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비록 일부 팬들의 눈물겨운 명예 회복이 있었음에도 이 작품 역시 지금의 관람 태도로 보자면 비판의 여지는 충분히 많다. 아무리 색다른 '제임스 본드'라도 이미 숀 코너리가 일구어놓은 탄탄한 기반이 있었으니 캐릭터의 특성을 아예 벗어날 순 없었고 인물의 성장을 위해 여성이 희생당하는 충격적인 결말은 당시로서는 참신했어도 지금 제작되는 신작이었다면 거센 몰매를 맞아 묻혔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노 타임 투 다이 (No Time To Die, 2021)]는 [여왕 폐하 대작전]의 이상적인 변주이자 역대 시리즈 중 가장 솔직하고도 서글픈 007이다.

 

  [두 번 산다], [죽느냐 사느냐], [스카이폴] 등 죽음에 대한 모티브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였지만 이만큼 확실하게 끝장을 낸 작품은 처음이라 뒷통수를 맞은 듯한 생소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 전까지 숱한 배우 교체와 느슨한 리부트를 겪었으나 새로운 '본드'가 나타났다는 선전 포고만 있었지 직접적으로 마지막을 의식한 채 무대를 열었던 적은 없었기에 [노 타임 투 다이]는 그 어느 007보다도 비장하고 드라마틱한 정서를 풍기고 있다. 이전에 [여왕 폐하 대작전]이 과감한 변화를 내세웠음에도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번 신작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이라는 명목 하에 액션은 액션대로 또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분명하게 제 역할을 해나간다.

 

  21세기에 접어들어 007의 시대 착오적인 설정은 늘 수면 위에 오르기 십상이었다. 냉전 시대도 끝이 나 시리즈의 총구 역시 갈 곳을 잃었고 주인공의 여성 편력은 더 이상 판타지 실현이 아닌 철 지난 발악에 그쳐버렸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은 이러한 한계를 인지한 채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한 접근으로 '제임스 본드'의 미래를 제시했다.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 상영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다는 인상이 있고 큰 그림을 위해 그동안 쌓아놓았던 캐릭터 설정이 급변하는 결함도 분명하지만 어차피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계속될 것이기에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생존 방안을 연구한 듯 보인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카지노 로얄], [스카이폴], [스펙터] 등으로 007의 존재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뒤이어 마지막 출연작인 [노 타임 투 다이]를 통해 앞으로의 방향성까지 톡톡히 챙기기까지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크레이그 이후의 '본드'는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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